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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안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카르벤튀스」
캔버스에 유채, 40.5x32.5cm, 1888, 패서디나, 노턴 사이먼 박물관 | |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90년)의 어머니
안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Anna Cornelia van Gogh)
결혼 전 성은 카르벤튀스(Carbentus)
고흐에게는 테오라는 동생이 있었다. 형제는 아주 가까웠고, 어른이 된 후에도 동생은 형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지원해주었다. 이들의 집안에서는 서로 편지를 쓰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형제와 자매, 또는 자식과 부모 사이에 오간 편지들은 그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준다. 고흐가 잠시 런던에서 일하던 시절 누이동생 안나가 그와 함께 살다 떠나자, 어머니는 테오에게 “이제 빈센트는 아침에 베이컨도 못 먹겠구나” 하고 걱정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프랑스 남부의 아를에서 살던 시절에 고흐는 편지 속에 동봉한 어머니의 사진을 받고는 테오에게 이렇게 썼다. “이 무채색 사진을 참을 수가 없어서, 나는 기억나는 대로의 어머니 모습을 어울리는 색깔로 그려보려 해.” 그는 그때까지 많은 초상화를 그리면서도 부모님을 모델로 해본 적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칠순이 다 된 어머니는 멀리 계셨고,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신 다음이었다.
평소 그는 풍경화이든 초상화이든, 그림을 그릴 때 모델이 눈앞에 있어야만 했고, 그러지 않으면 “가능하고 진실한 것에서 떠나” 전혀 엉뚱한 것을 그리게 될까 봐 불안해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억나는 대로의 어머니 모습”을 그렸고, 그 특유의 두꺼운 붓질로 녹색과 짙은 갈색의 조화를 만들어냈다. 이 초상화를 완성한 후, 그는 아버지의 초상화도 그려야겠다며 아버지의 사진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초상화를 그린 후 한 달 뒤에 고흐는 「정원의 추억」이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에서는 어머니의 모습이 다소 덜 분명하지만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물론 이 그림은 실물과 닮았다고는 할 수 없지. 하지만 내게는 이 그림이 내가 느끼는 정원의 분위기와 시적인 느낌을 잘 드러내주는 것 같아. 일부러 고른 색깔들, 달리아의 노란 빛깔이 점점이 찍힌 어두운 보랏빛은 어머니의 성격을 나타내는 거야.”
그의 어머니, 안나 코르넬리아는 부지런하고 활달한 여성이었다. 시골 목사의 아내로서는 특이하게도 그림 그리기가 취미였고, 아들에게 처음 그림을 가르친 것도 어머니였다. 아들의 천재성이 뒤늦게나마 인정받기 시작하자 그 누구보다 기뻐했던 어머니. 그러나 그녀는 사랑하던 두 아들 빈센트와 테오를 모두 앞세워 보내는 슬픔을 겪은 후 여든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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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마리아 피카소 로페스 초상」
캔버스에 유채, 73x60cm, 1923, 아를, 레아튀 박물관 | |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년)의 어머니
마리아 피카소 로페스(Maria Picasso Lopez)
피카소는 언젠가 자기 작품 속의 모든 남자는 어떤 의미에서 아버지를 그린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해서는 같은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그린 여성은 어머니였지만, 평생 수많은 여성을 그렸으니 말이다. 피카소는 회화, 스케치, 드로잉, 조각, 도자기, 판화 등 다방면에서 자신을 표현할 여러 가지 수단을 탐구했다. 그가 여성들을 그린 방식은 그녀들과의 개인적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 준다.
마리아 피카소 로페스(그는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는 활기차고 수완 있는 여성으로, 궁핍한 시절에도 현명하게 살림을 꾸려 나갔다. 친정에서 운영하던 포도원이 망한 후라 그녀는 결혼할 때 살림 밑천을 얼마 가져오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여동생 둘을 불러 함께 살았다. 피카소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와 이모들의 귀여움을 받았으며, 아마도 그의 놀라운 자신감은 그런 성장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의 이름의 첫 글자가 라피스(lapiz, 연필)와 같은 철자를 가진 ‘피스(piz)’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미술 교사였으며,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화가가 되는 데 반대하지 않았다.
피카소는 어머니의 초상화를 여러 장 그렸는데, 앞의 그림은 어머니가 앙티브로 와서 함께 휴가를 보내던 시절에 그린 맨 나중의 것이다. 이 그림에서 그의 어머니는 단순한 포즈를 취하고 있으며, 피카소는 몇 개의 선만으로 얼굴의 생김새와 날카로운 검은 눈초리를 유감없이 표현했다. 그 힘찬 선 안의 물감은 유채가 아니라 수채로 보일 만큼 엷게 칠해졌다.
그가 열다섯 살 때 그린 또 다른 어머니의 초상화에서는 어머니의 검은 머리칼과 확고한 옆얼굴이 화면 윗부분을 차지하고, 풍만한 가슴을 덮은 희고 가벼운 천이 아랫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아랫부분이 밝게 처리된 것은 파스텔이라는 재료의 특성 덕분인데, 작은 귀고리와 더불어 그녀의 여성적인 면을 잘 드러내 준다.
그의 어머니는 키가 아주 작았다고 한다. 피카소는 어머니가 의자에 앉았을 때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것이 안쓰러웠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피카소의 미망인이었던 자클린의 말에 따르면, 그는 어머니의 수수한 외모 때문에 종종 거북해하기는 했지만, 피카소 모자는 “놀랄 만큼 편안한 사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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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화가의 어머니」
캔버스에 유채, 41x33cm, 1888,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관 | |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년)의 어머니
알린-마리 고갱(Aline-Marie Gauguin)
결혼 전 성은 샤잘(Chazal)
고갱의 어머니 알린-마리 고갱은 유명한 페미니스트 작가인 플로라 트리스탕의 딸이었다. 플로라는 몇 대째 페루에 살고 있던 스페인 귀족 가문의 자손이었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어머니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으므로 사생아의 설움을 겪어야만 했다. 게다가 플로라는 결혼 생활도 순탄치 않아서 폭력적인 남편을 피해 다녀야 했고, 자신의 어린 딸인 알린을 남편에게 납치당하기도 했다. 알린은 여성도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방침에 따라 재봉사로 일하다가, 정치 기자인 남편 클로비스 고갱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남편이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그녀는 가족과 함께 페루의 친척을 찾아갔다. 대서양을 건너는 항해 도중에 클로비스는 죽었으나, 알린은 어린 아들과 함께 살아남을 결심을 하고 리마의 부유한 친척들 곁에서 수년간 머물렀다.
1855년 파리로 돌아온 그녀는 양재점을 열고 생계를 꾸리면서 아들을 엘리트 학교에 보냈다. 졸업 후 고갱은 선원이 되어 다시금 대서양을 건넜으며, 그가 떠나 있는 동안 알린은 세상을 떠났다. 훗날 그는 절절한 심정으로 어머니를 추억했으며, 특히 리마에서 보낸 시절을 그립게 회고했다. 그가 항상 지니고 다니던 소지품 중에는 어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이 있었으며, 이 초상화는 그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다.
초상화는 사진과 많이 다르며, 아마도 그가 잠시 반 고흐와 함께 아를에 머물던 시절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흐 역시 어머니의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그렸다. 고갱이 그린 알린은 미소를 띠면서도 직선적인 대담한 시선이 인상적이다. 그는 어머니의 입술은 실제보다 두텁게, 코는 더 펑퍼짐하게 그려 스페인 내지는 페루 혈통을 강조했다. 또한, 선을 단순화하여 얼굴 주위에는 숱 많고 곧은 머리칼을 늘어뜨렸으며, 옷의 레이스 칼라와 리본을 단순한 모양으로 변형시켜 밝은 노란 빛깔(고흐가 좋아하던 바로 그 색)의 바탕과 대조를 이루게 했다. 이런 단순화는 그가 다른 후기인상파 화가들과도 공유하던 화풍이다.
고갱의 이국적인 취미는 아마도 어린 나이의 남미 여행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다. 그는 브르타뉴에서든 타이티에서든 다른 사람들의 본성을 이해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이 야만인의 혈통을 타고났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플로라 트리스탕의 친구였던 조르주 상드는 친구의 딸인 알린에 대해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이 아이는 천사와도 같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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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알퐁스 드 툴루즈-로트레크 백작부인」
캔버스에 유채, 93.5x81cm, 1883, 알비, 툴루즈-로트레크 박물관 | |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년)의 어머니
알퐁스 드 툴루즈-로트레크 백작부인(Countess Alphonse de Toulouse-Lautrec)
결혼 전 이름은 아델 조에 타피에 드 셀레랑(Adele Zoe Tapie de Celeyran)
로트레크의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는 자매간이었다. 그의 아버지 알퐁스는 중세 이래로 프랑스 남서부의 막강한 영주였던 툴루즈 백작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어머니 아델의 가문은 지중해 가까운 곳에 성과 포도원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종사촌간이었던 부모의 결합은 그의 아버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충동적인 격정”의 발로였으나, 이 근친결혼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은 심한 신체적 기형을 가지고 성장하게 되었다.
알퐁스 백작이 사냥과 엽색에 탐닉하여 알비 인근의 성을 비우는 일이 잦아짐에 따라 결혼 생활이 힘들어지자 로트레크의 어머니는 신앙 생활과 아들의 양육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앙리는 비록 활발한 운동은 할 수 없었지만, 그림을 그리는 데서 기쁨을 발견했다. 훗날, 생계를 위해 돈을 벌 필요가 없었던 그가 파리에 눌러 살면서 화가가 되어 가문의 위신에 누가 될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하자, 그의 부모는 적잖은 우려를 나타냈다.
로트레크는 몽마르트르의 통속적인 사창가, 외설적인 카페, 시끄러운 카바레 등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즐겨 드나들었다. 그의 인상파 화풍은 “대강 썰어놓은 채소 같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북적이는 장소에서 가지고 다니기 쉬운 마분지 조각에 잰 솜씨로 그림을 그리기에는 그만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선명하고 눈길을 끄는 포스터들을 그렸으며, 이 방면에서 그의 영향은 20세기에까지 미친다. 그러나 그가 그린 어머니의 초상화들은 도회지의 격렬한 환락에 지친 그가 어머니에게서 구하던 고즈넉한 평안을 잘 보여준다.
알퐁스 백작부인은 아들이 그린 거의 모든 초상화에서 묵직한 눈까풀에 덮인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있다. 때로는 책을 읽고 있으므로 그럴 때도 있지만, 책을 읽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인 그 표정은 그녀의 절제된 성격을 말해준다. 이 그림이 그려진 1883년에 그녀는 보르도 인근의 말로메에 또 한 채의 성을 샀고, 그곳 포도원을 돌보는 일로 소일했다. 로트레크는 이곳으로 종종 어머니를 찾아갔으며, 찻잔을 앞에 놓고 있는 이 유명한 초상화도 아마 그곳에서 그려졌을 것이다. 마지막에도 그는 말로메의 어머니 곁을 찾아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았고, 아들이 남긴 그림들을 보잘것없는 습작이라며 치워버리려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의 천재성을 알리는 데 여생을 바쳤으며, 가문의 본거지인 알비 시에 툴루즈-로트레크 박물관을 건립해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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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쇠라, 「화가의 어머니」
종이에 콩테 연필, 31.2x24.1cm, 1882~3,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박물관 | |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1859~91년)의 어머니
에르네스틴 쇠라(Ernestine Seurat)
결혼 전 성은 페브르(Faivre)
쇠라는 내성적인 청년이었다. 창작에만 전념했고 사생활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극진했고, 1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비밀리에 애인과 동거하고 있었지만 저녁식사는 날마다 어머니와 함께했다. 아버지는 멀리 시골에 살았고 손위 누이들과는 열 살 이상 나이 차가 났으므로, 아들과 어머니 두 사람만의 파리 살림이었다. 쇠라 부인은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훌륭한 대화 상대였고, 아들의 작품뿐 아니라 동시대 미술 전반에 조예가 깊었다. 일례로, 그녀는 인상파 화가 카미유 피사로에게 그림을 주문하기도 했다.
쇠라는 인상파로부터 발전한 점묘법을 사용한 화가로 유명하다. 그의 시대 이전에 발전한 과학적 이론 덕분에 그와 그의 동시대 화가들은 세계를 재현하는 데 새로운 가능성들을 탐구할 수 있었다. 물감은 꼭 팔레트 위에서 섞을 필요 없이, 튜브에서 곧장 캔버스 위의 작은 점들로 옮겨질 수도 있었다. 그런 다음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면, 눈이 물감을 섞게 될 것이었다.
그의 회화 속 인물과 사물들은 이런 기법 상의 제약 때문에 정적으로 보이지만, 스케치는 훨씬 더 부드럽다. 그는 두껍고 거친 종이 위에 숯과 비슷한 콩테 연필을 사용했다. 그는 종종 어머니를 그렸는데, 이 초상화에서는 이마와 머리칼의 경계선, 턱선과 이목구비, 이 모든 것의 흐릿한 윤곽이 불분명한 배경 속으로 녹아든다. 손의 윤곽 역시 선명하지 않다. 명암의 대조는 뚜렷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그림자처럼 희미한 영상이 조용한 위엄을 띠고 있다. 종이의 우둘투둘한 질감 덕분에 콩테의 먹빛이 묻은 부분과 묻지 않은 부분이 마치 점묘화와도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이 초상화는 1883년의 <살롱>에서 낙선했지만, 입선한 또 한 점의 그림에 대해 비평가 로제 마르크스는 “명암에 대한 탁월한 탐구이며, 뚜렷한 존재 가치를 갖는 그림”이라고 평했다.
쇠라는 이른 나이에, 어머니의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작품이 잊히지 않게끔 그의 명성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녀는 편지와 신문 기사, 그의 작품을 소장한 이들이 보내온 각종 문서들을 모아두었다. 오늘날 그는 비록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회화의 기술적 접근에 변화를 일으켜 20세기까지 영향을 미치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 | | | |